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문단 편집) === 조종실의 서열 관련 문제 === 사건 후 '''조종석에 탑승한 3명의 조종 승무원들 모두 [[대한민국 공군|공군]] 조종장교 출신'''으로 밝혀졌다. 참고로 박용철 기장은 1975년 공군 간부후보생학교에 입교한 조종간부 출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군 조종장교는 모두 [[공군사관학교]] 출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공군 조종장교는 공군 ROTC와 조종장학생을 통해 또 뽑는다.] '''다시 말해 기장이 공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부기장과 항공기관사가 공군사관학교 직속 선후배 사이'''였다. 혹자는 기장과 부기장이 공군사관학교 선후배 사이여서 마치 기장이 강압적으로 부기장을 짓눌렀다는 견해를 비춘다. 하지만 기장은 간부후보생학교 출신이므로 이는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공군 조종장교는 공사 출신과 비공사 출신끼리 파벌을 나누고 있다. 이 파벌은 항공사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보통 비공사 선배-공사 후배 관계의 경우 군대 짬밥 정도만 존중해 주고 대부분 서로 터치하지 않는다. 박용철 기장은 1987년에 공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송경호 부기장의 경우 공군사관학교 26기 출신으로 1994년 공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그리고 남석훈 항공기관사 역시 공군사관학교 11기 출신으로 1979년 공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서열에 따른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런데 [[상명하복]]이 몸에 배인 군인 출신끼리 모인 집단에서 조종석을 구성하고 있다 보니 '''감히''' 선배님이 모는 비행기의 조종대를 잡을 수 없는 분위기로 자연스레 굳어졌을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고정익 민항기 조종사의 대다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조종특기를 부여받은 후 '''10여 년 의무복무'''[* [[대한민국 해군]] [[해군 항공대|항공]][[병과]] 장교는 의무복무 10년이며, 2016년 기준으로 공사의 조종장교 의무복무는 15년이다. 조종장학생, ROTC는 13년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8년이었다. 이는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고기의 조종사들은 의무복무 8년 혹은 그 이하로 추정된다.]를 했던 이들이다. 이 정도면 진급이 빠른 조종특기의 경우 대충 [[소령]] 말 ~ [[중령]] 초는 되어야 전역할 수 있다. 참고로 중령이면 비행대대장 보직을 맡는다. 그리고 이렇게 의무복무를 마친 뒤에 민항사에 지원했거나 공군 [[학생군사교육단|학군단]]을 거친 케이스다. 그리고 군 내에서는 사관학교 기수를 대단히 중요하게 따지며 '''이는 전역 후 예비역 관련 행사 등에서도 습관처럼 적용된다.''' 즉, 전역하고도 사관학교 선배에게 같은 민간인으로서 대하지 않고 철저히 후배가 선배의 말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종 승무원들의 군 출신 서열만 놓고 보자면 '''셋 중 [[항공기관사]]인 남석훈이 가장 선배'''였고, 연령대로나 입사 시기나 비행 시간도 나머지 둘보다 훨씬 많았지만 조종실에서의 직급만 놓고 보자면 항공기관사가 '''세 사람 중 가장 하위 서열'''에 있었던 것이었다. 남석훈 항공기관사 입장에서는 박용철 기장이 군에서나 항공사에서나 짬밥으로는 후배이긴 해도 사관학교 직속 후배가 아니다 보니 실질적으로 선후배간의 강력한 상하관계라고 보기도 어렵고 조종석에서의 직급은 오히려 자신보다 두 단계 가까이 높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사실상 방관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실제 블랙박스에 기록된 기장과 항공기관사 사이의 칵핏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남석훈 쪽에서 혼잣말로 편하게 말을 놓는 경우가 간혹 있긴 해도 기장과는 대체로 상호 존칭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항공기관사는 조종석 내에서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기장에게 존중을 표하는 것이고, 기장은 항공기관사가 자신보다 하위 직급이긴 해도 입사 시기와 비행 경력이 많아서 짬밥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사실 기록된 대화 내용이나 뉘앙스를 분석해 보면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해 본 사람들은 익히 알 만한 [[중대장]]과 [[행정보급관]], 조금 높게 잡으면 [[대대장]]과 [[주임원사]]가 대화하는 미묘한 느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남석훈 항공기관사의 이런 애매모호한 위치'''는 사고 당시 박용철 기장이 조종실 내 분위기를 강압적으로 몰고 가거나 나머지 승무원들에게 불평하는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김포-괌 간 왕복 비행시간이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8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딱 채우는 바람에 초과근무 수당이 나오지 않는 것을 두고 박 기장이 신세한탄 비슷한 것을 하거나 야간 비행으로 피로를 호소하는 발언은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조종실의 분위기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고, 801편이 한국 비행기임을 안 관제소가 한국어로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말하자 재치있게 "수고하십시오." 라고 응답해 주는 등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여름철의 대표 피서지인 괌에 거의 도착하자 "여기가 괌이야. 괌 좋네." 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다.] '''송경호 부기장이 박용철 기장의 행동에 적극 개입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계기'''로 분석될 수 있다. 셋 중에 나이도 제일 많고 같은 사관학교 15년 대선배인 항공기관사조차도 기장에게 저렇게 존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셋 중에 나이[* 남석훈 기관사 1940년 생, 박용철 기장 1951년 생, 송경호 부기장 1956년 생.]로나 군 짬밥으로나 가장 막내였고 항공사 경력도 가장 신참이었던 부기장으로서는 기장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가 더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이들 중 누군가가 조종실의 분위기를 딱히 나쁘게 몰아간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권위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조종실에서 군 출신 구성원들로 성립된 짬밥 및 파벌 서열과 조종실 내에서의 직급 서열이 뒤섞이며 엉망이 되어 이들 간에 명확한 서열 기준이 없어지면서 빠른 의사 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결국 조종 승무원들은 1분 1초가 아쉬운 긴급 상황에서 멘붕과 망설임으로 시간을 지체하다가 참사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을 마지막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되었다. '''어찌보면 당시에 송경호 부기장이 박용철 기장에게 착륙 포기를 구두로만 수 차례 건의한 것은 그 당시 [[고구마|조종실 분위기]] 속에서 나름 최대한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구두 건의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조종권을 스스로 인수했다면 당시 조종실 분위기를 감안해 볼 때 선배의 권한을 멋대로 가로챈 버릇 없는 후배로 낙인찍힐 것이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기장이 기장을 무시하고 갑자기 조종간을 잡아당겼다고 가정해 보자. 살았을 수는 있겠지만 조종실 분위기는 갑자기 싸해졌을 것이다. 가뜩이나 서열관계가 꼬여 애매한 분위기였으니,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순간이 되었을 수 있다. 사고를 복기해 보면 쉬운 상황에서 기장이 명백히 잘못하고 있는 것을 부기장이 인식한 것이 아니라 저 공항 자체가 착각하기 좋게끔 짜여져 있었으므로 기장뿐만 아니라 부기장도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부기장도 확신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착륙 포기하자고 건의를 했고 기장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5초'''였다. 충돌 7초 전에야 부기장이 착륙 포기하자고 말했고 충돌 3초 전 기관사도 착륙 포기한다고 말했고 충돌 2초 전 기장도 받아들였으니 딱히 기장이 권위주의적으로 찍어눌러서 부기장의 의견을 묵살했기보다는 셋다 멘붕과 패닉에 빠져 당황하다가 사고가 벌어진 것에 가깝다. 부기장이 마음 먹고 복행을 시도했어도 [[알리탈리아 404편 추락 사고|기장이 제지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결과론적으로 사고를 복기하면서 초단위로 분석하다 보니 저때 부기장이 조종간을 잡아당겼어야 한다고 하나 기장이 딱히 독단적으로 운행하고 있던 상황도 아니었던 만큼 부기장이 조종권을 빼앗기보다는 착륙 포기하자고 건의를 했던 것이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만약 착륙 포기하자고 말을 하자마자 바로 기장도 OK해서 올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론적으로 기장이 받아들이는 데 5초가 걸릴 것이란 것은 당시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란 점, 그리고 또 그 5초가 생과 사를 가르는 시간이 되리란 것은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는 몰랐을 테니 아쉬울 따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